80년대와 90년대는 그야말로 홍콩 영화가 전 세계 비디오 대여점과 극장가를 완벽하게 점령하던 전설적인 황금기였다. 당시 청춘을 보냈거나 비디오테이프를 들어본 세대라면 누구나 주말마다 어떤 홍콩 영화를 빌려볼까 행복한 고민에 빠졌던 아련한 추억 하나쯤은 가슴속에 안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 시절 홍콩 영화가 주는 특유의 아날로그 감성과 화려한 무술 액션, 그리고 애절한 로맨스에 완벽하게 빠져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수많은 홍콩 명작들 중에서도 아직도 내 머릿속에 가장 강렬하고 아름다운 잔상을 남긴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 임청하와 장국영 주연의 <백발마녀전>을 들 수 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다시 돌이켜보아도 여전히 가슴을 아리게 만드는 그 시절 나의 인생 영화에 대해 솔직하고 진솔한 감상평을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임청하라는 독보적인 아우라와 장국영의 만남이 준 기대감
내가 이 영화를 접하게 되었던 당시, 홍콩 영화계에서 임청하라는 이름 석 자는 가히 절대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보증수표였다. 영화 <동방불패>를 통해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선보이며 아시아 전역에 중성적인 매력의 신드롬을 일으켰던 그녀였기에, 그녀의 새로운 무협 로맨스 작품이 개봉한다는 소식만으로도 내 마음은 이미 기대감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부드러운 눈빛과 섬세한 감성 연기로 수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던 장국영이 상대역으로 합류했다는 사실은, 이 영화를 반드시 봐야만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어주었다.
당대 최고의 톱스타이자 거대한 아우라를 지닌 두 배우가 한 스크린 안에서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영화 팬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정파와 사파라는 절대로 함께할 수 없는 운명의 갈림길에 선 두 남녀 주인공 탁일항(장국영)과 연호상(임청하)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는, 영화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나의 감성을 자극했다. 화려한 무술 액션 뒤에 숨겨진 깊은 로맨스의 서사가 과연 두 대배우를 통해 어떻게 그려질지 설레는 마음을 안고 화면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밤을 지새우게 만든 지독한 사랑과 백발이 되어버린 명장면의 충격
영화를 감상하면서 가장 가슴 깊이 파고들었던 대목은 역시 정파의 압박과 오해 속에서 상처받은 연호상의 비극적인 서사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조차 배신당했다고 믿어버린 절망과 분노 속에서, 아름답던 그녀의 검은 머리칼이 순식간에 하얗게 변해버리는 '백발 변신 신'은 스크린을 보던 나에게 엄청난 충격과 전율을 안겨주었다. 배신감과 슬픔에 젖어 하얗게 샌 머리칼을 휘날리며 광기 어린 눈빛으로 변모하던 임청하의 연기는, 공포감을 넘어선 서글픈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녀가 느꼈을 배신의 고통과 지독한 슬픔이 화면을 뚫고 온몸으로 전달되는 듯했다.
또한 눈 내리는 산봉우리 위에서 연호상의 마음을 되돌리고 그녀의 백발을 다시 검게 바꿀 신비한 꽃을 피우기 위해, 오랜 세월 홀로 외로이 추위와 싸우며 기다리던 탁일항의 마지막 모습은 오래도록 가슴을 멍하게 만들었다. 서로를 향해 엇갈린 오해와 비극적인 운명 앞에서도 끝내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어릴 적 그 시절 밤잠을 설치게 만들 만큼 강렬한 잔상을 남겼다. 화려한 칼싸움이나 기괴한 요술 연출보다도 두 주인공이 보여준 절절한 눈빛 교환과 처절한 사랑의 깊이가 이 영화를 최고의 명작으로 완성해 주었다.
아날로그 낭만이 그리운 요즘 꼭 다시 추천하고 싶은 명작
물론 4K 고화질과 최첨단 특수효과(CG) 기술이 보편화된 요즘 영화들과 비교한다면, 90년대 초반에 제작된 <백발마녀전>의 와이어 액션이나 특수 분장, 그리고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안개 연출 등이 다소 투박하고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시각적인 세련미나 자극적인 쾌감만을 좇는 요즘 관객들의 눈에는 장면 전환이나 일부 특수효과가 다소 어색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술적 아쉬움을 뛰어넘는 90년대 홍콩 영화 특유의 독보적인 아날로그 낭만과 깊은 감성 때문에 이 영화를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장국영이 나지막이 불러주던 아련한 주제가(OST) 음악과, 붉고 푸른 조명을 활용해 몽환적이면서도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해 낸 연출법은 요즘의 첨단 기술로도 결코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독창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시절을 풍미했고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장국영의 찬란했던 리즈 시절과, 임청하의 미친 카리스마를 스크린으로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꼭 한번 찾아봐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
처음 천녀유혼의 왕조현을 보고 그 미모에 좋아하였지만 백발마녀전의 임청하를 보고 난 뒤 나의 첫 번째가 임청하로 바뀔 정도로 인상 깊고 강력한 영화였다.
그 뒤로 임청하를 보기 위해 일부러 찾아보기도 했었다.
다만 아위웠던것은 임청하는 생각보다 많은 영화를 찍지 않고 언제부터인가 스크린에서 나오는 걸 보기 힘들었다.
세기말 홍콩 무협 영화가 전해주는 진득한 로맨스와 레트로 감성에 빠져보고 싶다면, <백발마녀전>이 전하는 거대한 사랑의 여운을 꼭 한번 느껴보시기를 바란다.